창조신학에 의한 세상과 인간 이해

 

창조신학에 의한 세상과 인간의 이해는 몇 단계로 구분하여 설명되어진다. 첫단계는 영원한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다. 창1:1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말씀하신다. 성경은 모든 만물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이 먼저 계시다는 것을 전제로 하며 시작한다.

 

둘째 단계는 물질과 에너지가 질서 있게 창조된 것이다. 창1:1의 "천지" 즉 "하늘과 땅"이라는 표현은 그 안의 모든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물질을 존재케 함과 동시에 공간이 존재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시간이 시작되게 되었으며, 에너지가 존재하였다. 시간, 공간, 물질, 에너지는 분리될 수 없는 것들이다. "창조"의 "바라"는 아무 것도 없는 무에서 유로 창조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들은 저절로 생성 소멸되지 않는 것이다. 즉, 열역학 제1법칙의 시작인 것이다.

 

셋째 단계는 환경의 창조이다. 창1:1-5의 창조 1일에 시간, 공간, 물질, 빛, 어두움의 환경이 창조되었다. 거주할 자를 생각하며 환경을 창조하신 것이다. 창1:2의 "깊음"이라는 표현은 물과 흙이 질게 반죽되어진 상태와도 같은 것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이 반죽이 주위의 물들과도 분리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래서 아직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인간이 머물러 살 수가 없는 상태이다. 이것을 창1:2에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혼돈은 단순히 어지러운 상태가 아니라 의도된 거주자에게 알맞도록 질서가 세워지지 않은 것을 뜻한다. 공허는 비어있고, 허무한 상태가 아니라 의도된 거주자가 그 안에 머물지 않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흑암은 빛이 없는 상태이다. 이 상태의 지구가 창조됨과 동시에 자전을 시작한 것이다. 이 상태에서 창1:3은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심으로 빛이 있게 되어 흑암 대신 빛이 공간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이었다. 빛은 광자로서 포톤(Photon)이란 입자로 설명할 수 있다. 빛과 광원은 다른 것으로서 광원은 빛인 포톤을 방출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이 빛을 모아 낮이라 칭하셨고, 빛이 없는 곳을 어두움이라 칭하셔서 빛과 어두움을 분리시켰다. 이로서 창조 1일이 끝난 것이다. 지금의 시간으로 대략 짐작한다면, 아침 6시에 일을 시작하셔서 빛의 창조로 일을 마쳤을 때가 18시이며, 그 다음날 6시가 됨으로서 첫째 날이 끝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 하루를 추측해 보면, 처음 출발점이 6시로부터 시작하여 빛의 창조 이전에 6시간동안 흑암 속에서 계속 회전하고 있었고, 12시에 빛이 창조되었고, 18시에 밤을 맞이하여 다음날 6시에 새 아침을 맞이하였다고 할 수 있다. 즉 6시간의 흑암(6시-12시)과 6시간의 낮(12-18시)과 12시간의 밤(18-6시)으로 되어 18시간의 어두움이 있었던 첫날이다. 둘째 날부터는 정상적인 하루가 되었다.

 

창조2일에는 궁창을 만드셔서 하늘이라 칭하셨다. 그리고 궁창을 통해 물 반죽 상태의 지구 표면의 물을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 반죽 상태로 나누셨다. 하늘 위의 물층과 하늘 아래의 물층으로 분리시키신 것이다. 이 궁창 위의 물은 나중에 노아의 홍수시 심판의 도구로 쓰일 것이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는 표현을 쓰지 않고 있다. 궁창 위의 물은 지구 환경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었다. 이 물층은 지금의 대류층, 성층권, 전리층 등 중에서 대류층에 있는 영원한 구름과 같은 층을 설명하는데 사용되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물층은 지상 1.5-3 km에 1-1.5 km 정도의 두께로 존재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물로 된 수증기층은 장파장의 빛을 잡는데 효과적이다. 그러므로 대류층에서 지구에 들어 온 장파장은 거의 손실 없이 이용될 수 있다. 그래서 지표면은 온실효과에 의해 남극에서 북극에 이르기까지 따뜻하며, 해양도 위도에 관계없이 따뜻했을 것이다. 반면에 단파장은 전리층에 있는 오존층에 의하여 차단된다. 장파장은 오존층을 뚫고 들어와 성층권으로 들어오며, 물층에 의해 약간 반사되고 대부분 침투해 들어온다. 태양의 장파장은 지구에 흡수되고 지구의 장파장은 물층에 의해 잡혀지는 것이다. 현재 지구는 얇은 오존층을 가지고 있지만 홍수 전에는 훨씬 두꺼운 오존층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오존은 단파장의 태양 광선에 의해 만들어지고, 장파장의 지구나 태양광선에 의해 파괴되기 때문이다. 오존은 산소가 단파장에 의해 분해되어 생성된다. 현재 지구는 장파장의 광선이 오존층을 파괴하고 있지만 홍수 이전에는 물층이 이 장파장을 잡아주므로 오존층의 파괴를 막을 수가 있었다. 홍수 이전의 지구는 두꺼운 오존층과 물층과 고농도의 이산화탄소(대기의 0.1-0.2%)로 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현재 해양은 이산화탄소 양의 90%를 용해하고 있으며 나머지 10%만이 대기와 동식물에 분포하고 있다. 그러나 온도가 약 27도 정도로 높았을 당시에는 해양에 용해되는 정도가 낮기 때문에 대기 중에 많은 이산화탄소가 있었을 것이다. 오존층에 의해 걸러지지 않은 햇빛은 자외선이 풍부하여 원형질 내의 화학결합을 파괴함으로서 생물을 해롭게 한다. 지구 위의 생물은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오존층에 의해 직접 들어오는 자외선으로부터 보호됨으로 생존할 수 있다. 또한 오존 자체도 동물과 사람에게는 해롭다. 그런데 홍수 전에는 오존층 아래에 물층이 존재했기 때문에 지표면에는 오존이 거의 없었다. 즉 홍수 전 대기의 구조를 보면, 첫째로 전리층의 오존층이 훨씬 두꺼워 단파장의 광선을 효율적으로 차단하며, 해롭지 않은 장파장은 통과시킨다는 것이다. 둘째로, 대류권에는 오존이 거의 없으며, 물층에 의해 온실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다는 것이다. 이로써 동식물 모두 풍성하게, 그리고 거대하게 발달한 것이다. 그리고 아주 느리게 노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궁창 위의 물층이 노아의 홍수시 심판의 도구로 쓰인 다음 지구의 모든 환경은 달라진 것이다. 이래서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다는 표현을 쓰지 않고 계신 것이다.

 

창조 3일째는 지구상의 물을 한데 모으고, 뭍이 드러나게 하셨다. 이로써 지구를 바다와 육지로 분리하셨다. 육지가 하나였고 바다가 하나였다. 노아의 홍수시까지 하나였던 육지가 홍수의 대 격변으로 몇 개의 판으로 갈라져 이동하여 현재와 같이 되었다. 이것이 1912년에 독일의 기상학자 베게너가 주장한 대륙이동설이다. 이것은 분리된 대륙의 해안선이 일치하고, 단층과 습곡이 일치하며, 양쪽 대륙의 지질 구조와 빙하의 흔적이 일치하며, 양쪽 대륙의 화석이 일치하기에 나온 결론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대륙 이동의 원동력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지지를 받지 못했었다. 그러나 1950년대에 와서 고지자기의 연구를 통해 대륙이 이동되었다고 학계에 인정되게 되었다. 퇴적암 속의 자철석 입자의 양극은 그 암석이 퇴적된 후 아무 변동을 받지 않았다면 퇴적 당시의 지자기의 극방향을 가리키게 된다. 한 번 자화된 광물은 그 후 지자기가 변하더라도 과거의 지구 자장의 방향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고지자기 또는 잔류자기이다. 그래서 고지자기를 측정하면 과거 자장의 모양, 즉 자극의 위치와 세기 등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측정 결과 지질시대에 따라 자북극이 이동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대륙이 이동했다고 할 때만 설명이 되는 것이다. 과거에 모든 대륙이 하나였다는 것이다. 진화론자들은 대륙 이동의 원인을 맨틀대류설이라는 가설로 설명하고 있고, 창조론자는 노아의 홍수시의 대격변설로 설명하고 있다.

 

창조 3일은 또한 식물을 창조하신 날이다. 창조 3일째에 각기 종류대로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과목이 나게 하셨다. 식물과 동물 모두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종류대로"라는 표현이 11, 12, 21, 24, 25절에 10회가 반복되고 있다. 현대 생물학에서는 유연관계가 있는 것끼리 일정한 분류 체계를 정하여 놓고 이것을 진화의 계통도나 생물의 외형적, 생리적, 화학적 비교에 응용한다. 그러나 성경상의 종류는 교배가 가능한 범위를 말한다. 어떤 경우는 현대 생물학의 종에 속하기도 하고, 속이나 과에 해당하기도 한다. 말과 당나귀를 서로 교배시켜 노새를 생산할 수 있는데 생식력이 없다. 그러므로 이 두 종은 "종류"라는 말의 한계에 가까운 것이다. 이 종류의 경계를 넘어선 종류 사이의 교배는 생식력이 없거나,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로써 아침 6시에 시작해서 18시에 일을 끝내시고 다음날 6시가 되었을 때 창조 3일이 끝나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상태였다. 식물의 창조로써 거주자들이 살 거주지의 환경이 다 창조되었다. 혼돈과 흑암이 없는 질서와 빛이 온 누리에 펼쳐진 것이다. 식물들은 창조됨과 동시에 밤을 맞이하게 되었고 다음 날의 광명을 기다리게 되었다.

 

넷째 단계는 창조 4일째 부터로서 각 영역에 거주하며 지배할 자를 창조하신 것이다. 4일째는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셨다. 큰 광명을 만들어 낮을 주관하게 하셨다.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셨다. 그리고 광명을 통해 주야를 나뉘게 하시고, 주관하게 하셨다. 빛과 어두움을 주관하는 주관자가 되게 하셨다. 두 광명이 낮과 밤을 주관한다는 것은 낮과 밤이 이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4일째 창조물인 해, 달, 별 등의 천체의 창조 목적은 하늘에 거주하며 시간의 측정과 구분을 하도록 하기 위해 만드신 것이다. 주목적이 생물의 생명 유지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태양 없이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생물을 창조하실 수도 있으신 분이시다. 이것을 만드신 목적은 주야, 사시, 일자, 연한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질서 있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만드신 것이다. 지구에서 보이는 달과 태양의 겉보기 크기가 동일한 것은 바로 인간을 위한 창조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은 해, 달, 별과 이것들로 인한 현상 중 어떤 것으로도 날을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은 창1:5에서 빛을 낮이라 칭하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였다. 그러므로 낮을 주관한다는 것은 빛을 주관한다는 것이다. 빛을 주관한다는 것은 큰 광명이 빛인 광자를 내 보내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아침 6시에 일을 시작하여 18시에 저녁이 되고 다음날 6시에 아침을 맞이하여 창조 4일인 끝난 것이다. 이로써 창조 3일째 창조된 식물들이 창조 4일째 만드신 광명들로부터 나오는 빛을 통해 광합성을 하며 살아가게도 된 것이다. 우주의 공허가 채워져 충만으로 되었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태양의 크기나,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나, 지구의 크기 중 어느 것이라도 10%만 늘거나 줄어도 지구상에는 어떤 생명도 존재할 수 없는 구조이다. 또한 지축이 23.5도 기울었기에 계절의 변화가 오고, 주거 공간이 배로 늘게 되었다.

 

창조 5일째는 하늘과 바다에 거주할 자를 만드셨다. 물고기 등 물에 사는 생물을 그 종류대로 만드셔서 물을 채우게 하셨다. 새와 같이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만드셔서 땅 위의 하늘을 채우게 하셨다. 여기서 새는 히브리어로 "오프"로서 날짐승을 뜻한다. 새들뿐만 아니라 나는 곤충들이나 나는 포유류, 파충류까지 다 포함하는 것이다. 이로서 하늘과 바다가 채워져 충만해졌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복을 주어 생육, 번성, 충만하여 삶의 영역에 가득 채우게 하셨다. 아침 6시에 시작하여 18시에 저녁을 맞고 다음날 6시에 아침을 맞으며 창조 5일이 끝났다.

 

창조 6일째는 땅에 거주할 자를 만드셨다. 땅의 짐승과, 육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셨다. 육축은 양, 소, 개, 말과 같이 항상 길들여져 있는 동물들이다. 기는 것은 조그만 파충류와 곤충들로서 현재 80만여종이 명명되어 있다. 땅의 짐승들은 인간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지 않고 자유롭게 배회하는 야생 동물들이다. 이것들이 땅에 충만하게 하셨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다섯째 단계로 성경은 인간의 창조를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환경과 지배자를 다 만드신 후 사람을 창조하셨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질서와 조화와 충만으로 변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환경이 구성된 후 사람을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영과 육을 지닌 생령이 되게 만드셨다. 그런데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남자와 여자가 연합될 때 이 연합체가 곧 사람이다. 창1:27에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하셨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하는 존재를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먼저 아담을 만드시고 그에게 돕는 배필을 만들어 주셨다. 돕는 배필은 그에게 "일치하는 조력자"이다. 아담에게 일치하며 조금의 어긋남도 없고, 맞지 않는 부분이 없는 조력자이다. 아담은 전체 중의 한 부분으로 표현되는 존재였다. 이 아담이 완전해지려면 그에게 일치하는 조력자가 있어야 한다. 그가 여자 하와였다. 이 남자와 여자를 합친 1+1=1인 한 인격이 사람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창조 질서의 유지를 위해 사람에게 사명과 권세를 주셨다. 하나님께서 남녀가 연합된 이 사람에게 명령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무엇인가? 창1:26에 인간을 만드신 목적이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기 위함이라 하셨다. 창1:28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명령이 나온다. 첫째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것이다. 둘째는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창1:26의 말씀과 비교할 때 땅의 정복은 다스림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의 존재양식과 두 명령이 인간에게 중요한 요소이다. 인간이 하나님 형상으로 명령을 기억하며 수행할 때 질서와 조화가 유지된다.

 

그러므로 창조된 인간이 기억해야 할 주요 명령은 세 가지이다. 첫째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창2:16-17의 명령을 기억하여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 명령을 늘 간직하며 명령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경배"하여야 한다. 창2:8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두다(쑴)"라는 단어는 "놓다, 두다, 위치시키다, 세우다, 정하다, 임명하다"의 의미를 지니는 단어로서 성막과 성전에서의 제사장직과도 밀접한 유사성을 갖는 단어이다. 즉 경배하고 순종하는 것과 관련된 용어로서 아담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순종하도록 동산에 놓여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수직적 관계에서 대제사장직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해 믿음으로 제사 드리는 예배의 삶을 주관해야 한다. 이것은 인간의 실존을 알게 한다. 하나님을 알고 인간을 알게 하는 명령인 것이다. 곧 이 실존을 알고 믿음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창1:28의 명령을 기억해야 한다. 이 땅에서 생육,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야 한다. 시간적 관계에서 선지자직을 감당해야 한다. 피조물로서 생육, 번성하여 미래로 가며 땅에 충만해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자, 인간을 아는 자의 수가 이 땅에 가득 채워지게 하는 것이다. 양적으로도 가득 차며, 질적으로도 가득 차게 하는 것이다. 곧 그 수로 충만케 될 그 때를 바라보는 소망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창1:26의 명령을 기억해야 한다. 이 땅의 만물을 "다스려야" 한다.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은 "다스려야" 한다. 땅을 경작하고, 경영하여, 그 소출을 내도록 관리해야 한다. 만물이 자신의 속성대로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유익을 주도록 다스려야 한다. 수평적 관계에서 왕직을 감당해야 한다. 만물이 하나님 안에서 조화를 유지하게 왕적 다스림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이것은 만물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다. 만물을 소상히 돌보는 사랑과 관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왕적 신분으로서 행하는 사역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다스림은 사물들의 본성을 그 본성대로 알고, 활용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만물이 서로 충돌함이 없이 자기의 기능을 다하도록 이끄는 역할이다. 만물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관리해야 하는 것이다. 만물이 하나님의 의도대로 조화를 유지하도록 관리하는 청지기 사명인 것이다. 만물을 향한 사랑의 수고를 하여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게 하는 사명이다. 곧 기뻐하심을 기대하며 행하는 사랑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이 명령은 남녀의 일치하는 연합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은 가정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동기나 끼리끼리의 모임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부부 중심의 가정단위가 기본이 되어야 하는 것임을 알려 주고 있다. 하나님은 이 부부중심의 사람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다스리게 위임하셨다. 그래서 남녀가 연합하여 그 형상을 중심으로 만물을 다스려야 한다. 하나님은 창조 5일째까지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셨다. 그러나 6일째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심히"라는 말을 추가하셨다. 이것은 인간의 창조로 인해 모든 창조가 완성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완전한 질서가 이루어졌고, 인간을 통해 영광 받고 계심을 표현하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고, 사명을 감당할 때만 질서와 조화가 있다. 하나님의 명령이 수행되는 곳에 완전한 질서와 조화의 아름다움이 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만물의 관리자인 것이다.

 

인간의 창조를 마침으로 모든 것을 완성하신 하나님께서 7일째 안식하셨다. 6일간의 열심 있는 사역은 결국 질서와 조화를 완성해 나가는 사역이었다. 이것이 완성되었을 때 안식하신 것이다. 인간의 진정한 안식은 그의 중심적 위치에서 질서와 조화를 이루었을 때이다. 이 안식이 있을 때만 정상적인 하나님 경배와 만물의 다스림이 이루어진다.

 

창2:15에서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명령은 창조세계의 완벽한 환경에 놓여진 인간에게 첫 명령이 주어지기 전에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에 나타나는 세 개의 동사는 인간의 존재 목적을 알려준다. "두사(야나)"는 이곳에 처음 등장하는 용어이며, "다스리며(아바드:섬기다)"와 "지키게(솨마르)"는 창2:8의 "두다(쑴)"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두사(야나)라는 단어는 "놓아두다, 머물도록 허락하다, 쉬다, 정착하다"의 뜻으로서 안식, 안전과 관계된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야나"시킨 것은 아담을 안식할 곳에 두신 것이다. 인간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위치할 때 안식을 누린다. 인간은 에덴에서 돕는 배필과 함께 에덴에 머물 때 안식을 누린다. 창2:15의 "야나"는 인간으로 하여금 최초의 행위명령을 통하여 특정한 위치에 머물게 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창2:16-17의 최초의 금령은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머물러야 함을 알려주며, 창2:18-25는 돕는 배필과 함께 한 가정에 머물러야 함을 알려주고 있다. 즉, 야나는 주어진 위치에 머무를 때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그 머무는 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며, 평안한 곳이며, 안식을 누릴 곳으로서 모든 사명의 역할이 그 안식으로부터 출발하게 됨을 알게 된다.

 

즉, 인간은 "안식"할 수 있고, "안전"한 동산에 "두어" 졌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동산, 아담과 하와의 가정은 안식하는 곳이며, 안전한 곳이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통해 안식하도록 두어졌다. 또한 에덴 동산을 "다스리며 지키도록" 두어졌다. "다스리며 지킴"은 하나님께의 순종이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삶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의 다스림과 지킴이 순종과 경배의 삶이다. 더욱이 가정은 경배와 순종과 안식과 안전의 중심임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두신 가정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다스리며, 지키는 사역을 행하는 곳으로 안식을 주는 곳이다. 창세기 1, 2장의 창조신학적 창조구조는 이러한 인간의 위치와 목적을 더욱 분명하게 설명해 준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께서 정해준 위치인 하나님과 만물 사이에 놓여져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이대로 만물을 다스려야 한다. 이럴 때에만 인간의 존재 의미가 있다. 하나님 안에서만 존재 의미가 있다. 이 위치를 지키며 받은 사명을 잘 감당하여야 한다. 만물로 하여금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즉,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영광 받으시는 데 인간의 근본 목표가 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삶의 목적이 있는 것이다. 만물은 하나님의 형상의 주권아래 있다. 만물이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육체적인 주권 아래에 놓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형상으로서 사명을 감당할 때 곧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만이 사람다운 사람이다. 사람의 창조목적이 다스림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이 사명은 오늘날 인간의 존재 목적을 알게 한다. 사람의 지위에 대해 알게 한다. 인간은 하나님 아래 있고, 만물 위에 있게 된 것이다. 사람이 이 지위를 지키지 못하면 사람다운 사람이 되지 못한다. 또한 피조물의 질서와 조화가 파괴된다. 인간이 사명을 감당할 때 인간과 하나님 사이가 질서와 조화 속에 있게 된다. 인간과 인간 자신 사이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조화가 유지된다. 인간과 만물 사이에도 질서와 조화가 유지되게 된다. 이러한 질서와 조화 속에 있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여야 한다. 하나님을 알고, 그 아는 것을 인간 사이에서 나누며 전파해야 한다. 만물을 다스리는 자여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존재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라고 하신다. 이것이 창조질서이다.

 

다시 말하면 창조질서는 인간이 한 가정을 이루고, 하나님과 만물 사이에서 첫째로, 생육, 번성, 충만함으로 이루어진다. 둘째로, 온 땅을 정복함으로 이루어진다. 셋째로, 바다와 하늘과 땅의 모든 움직이는 생물, 즉 동물을 다스림으로 이루어진다. 결국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을 잘 가꾸고 보살피라는 명령을 수행할 때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과목과 채소를 식물로 주시고, 동물들에게는 풀을 식물로 주셔서 삶의 영역을 한정지어 주셨다. 서로의 한정된 영역에 살며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해야 한다. 인간이 창조되어 하나님과 만물 사이에 존재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이제 인간은 영과 육을 지닌 존재로서 그 중간 위치에서 영이신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육인 만물을 다스리며, 생육 번성 충만해야 한다. 위로는 선악과를 보며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며, 아래로는 만물을 다스림의 권위로서 경계를 기억하며,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만물을 다스려 질서, 조화, 충만을 유지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여섯째 단계로, 성경은 이 질서가 인간의 죄로 인해 붕괴 및 퇴락의 단계에 들어갔다고 말씀하신다. 모든 생명과 물질이 질서에서 무질서의 상태로 변해가고 있다. 창세기 3장에서 보면, 인간의 불순종과 죄악은 모든 질서와 조화를 깨뜨리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하나님의 창조물들은 파괴되어가기 시작하였다. 에덴동산에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많이 있었다. 이 에덴에 근원을 둔 네 강이 사방으로 흐르는 아름다운 낙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이 에덴을 만드셨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에덴을 만드시고 인간을 그 에덴에 두셨다. 그리고 에덴동산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다. 에덴동산을 관리하며, 지키고, 돌보고, 경작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곳에다 사람이 사명을 감당할 때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시켰다. 창2:9에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온다. 이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어떤 나무를 뜻할까? 생명나무인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인가? 아니면 이것이 아닌 다른 나무들인가? 이것은 인간에게 허용된 모든 나무들을 뜻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허용된 식물들이 모두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인 것이다. 이곳에서 사람이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는 거의 무한대의 자유를 주셨다. 하나님은 선악과 외의 동산의 각종 나무의 실과를 임의로 먹게 하셨다. 인간은 좋은 것을 풍성히 누리며 살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 질과 양은 거의 무한대인 것이다. 인간이 가장 좋은 것을 무한대로 풍성히 누리며 살 수 있는 정도의 것이다. 그중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 한 가지만을 금하셨던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무엇일까? 바로 인간으로 하여금 피조물의 위치를 알게 하는 경계선인 것이다. 인간과 창조주와의 질서의 경계선이다. 하나님의 고유 영역이 있음을 알게 하는 경계선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 경계선 안에서 그 도덕적 본성을 발휘하게 하셨다. 경계선 안에서 만물에게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뜻을 펼치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는 두 곳의 큰 경계선이 있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는 "선악과라는 경계선"이 그어져 있다. 사람과 만물 사이에는 "다스림이라는 경계선"이 그어져 있다. 선악과는 "영"이신 하나님과 "영과 육"으로 된 인간 사이의 경계선이다. 다스림은 "영과 육"으로 된 인간과 "육"뿐인 만물 사이의 경계선이다. 경계선이 유지되며, 인간이 이 경계선 속에서 역할을 수행할 때 조화가 있다. 위의 경계선을 인식하며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창조주 하나님께 경배해야 한다. 아래와 위의 두 경계선 사이에서 피조물로서 충만해야 한다. 아래의 경계선을 인식하며 만물과의 관계를 알며 다스려야 한다. 이 경계선들은 인간에게 최대의 자유를 주는 보장선이다. 이 경계선을 유지하며 역할을 수행할 때 하나님께 영광이고 이 땅에 평화이다. 이것이 질서와 조화 속에서 하나님이 심히 기뻐하시는 모습인 것이다.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통하여 인간과 최초의 계약을 맺으셨다. 어기면 죽고 지키면 산다는 계약인 것이다. 이것은 경계선을 넘으면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명령으로 주어진 계약을 인간이 어김으로써 계약은 파괴되었다. "그것을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유혹을 받아들여 계약을 어긴 것이다. 경계선을 넘고 싶은 유혹에 넘어가고 만 것이다. 이로써 인간은 그 즉시 영적으로 죽었다. 영적으로 죽은 존재는 결국 육적인 존재로서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 죽음은 모든 질서와 조화를 깨뜨리게 되었다. 창3:8에서 하나님과의 조화가 파괴되어 하나님의 낮을 피하여 숨게 되었다. 창3:10에서 인간 자신의 조화가 파괴되어 인간은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창3:12-13에서 인간 사이의 조화도 파괴되었다. 서로 책임을 전가하고, 시기와 질투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창3:17-19에서 인간과 만물 사이의 조화도 파괴되어 땅이 저주를 받았다. 수고의 대가로 소산을 얻게 되며, 땅에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나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수치심과 위선과 가식이 들어오게 되었다. 사랑의 하나님을 두려움의 하나님으로 느끼게 되었다. 여자는 잉태하는 고통이 더해지고, 수고하고 자식을 낳아야 되었다. 남편을 돕는 배필에서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의 다스림을 받는 자가 되었다. "사모하다"라는 뜻은 정을 드리어 애틋하게 생각하며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다. 우러러 받들고 마음으로 따르는 것이 사모하는 것이 아니다. "지배하고, 소유하려는 강한 욕망으로 그를 향해 요구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기에 이제는 일치하는 조력자가 아니다. 남편을 지배하고 소유하려는 강한 욕망을 지닌 짝일 뿐이다. 그런데 그것을 얻지 못하고 남편의 다스림을 받는 존재로 되었다. 이로써 부부의 충돌과 갈등은 반복되어진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될 때까지 이로 인한 부부싸움은 그칠 수 없다. (이 싸움은 주로 세 가지 형태이다. 첫째는 남자의 강한 지배로 인한 여자의 도전이며, 둘째는 여자의 강한 욕망에 의한 남자의 도전이고, 셋째는 남녀 휴전에 의한 하나님의 명령 포기의 형태이다. 21세기는 이 셋째 단계이다.) 남자는 종신토록 수고하게 되었다. 얼굴에 땀을 흘려야 소산을 먹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은 육적으로 죽어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함으로써 동산을 다스릴 자격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로써 창조의 질서는 파괴되어 부조리와 부조화 상태에 빠졌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모습으로 변해진 것이다. 인간의 범죄로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되었다. 자신도 모르고 이웃도 모르며 심지어 부부 사이도 모르게 되었다. 더군다나 만물은 더욱 모르는 존재가 되었다. 만물을 향한 인간의 위임통치가 엉망진창으로 되었다. 욕심 많은 못된 통치자가 되어 만물을 파괴하며 이기적 욕심만 채우려 한다. 그러므로 현재 모든 피조물은 허무한 상태에 버려져 탄식하고 있다. 썩어짐의 종노릇하며,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 해방되기를 고대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피조세계는 질서가 완전히 회복된 상태가 아니다. 비정상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에 있는 인간도 정상적인 인간다운 인간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 눈에 익숙하고 우리가 보기에 좋은 것이 다 선한 것이 아니다. 죄를 안고 있는 인간의 본성이 선한 것이 아닌 왜곡된 상태의 것이다. 사람이 잘못을 할 때 우리는 흔히 "사람이 다 그런거지 뭐"라고 한다. 그리고 이 말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인간적인 미덕이 있는 사람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모습이다. 잘못된 인간의 모습을 정상적이고,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비성경적 표현이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일들을 볼 때 무엇이 창조상태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해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를 분별하여야 한다. 창조시의 상태로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이 필요한지를 알아야 한다. 모든 피조세계의 질서가 파괴되고 꼬여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파괴된 세상에서 사탄의 역할이 크게 나타난다. 그 대표적인 역할은 인간으로 "혼미와 혼잡" 속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사탄이 이런 세상을 그냥 놔둘리가 없다. 자기 세력의 굳히기 작업에 들어가 있는 중이다. 그 작업은 두 가지 공정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바로 고후4:1-6에 나오는 "혼잡"과 "혼미"라는 특별한 과정이다. "혼잡"은 하나님의 진리를 그릇된 관념과 섞음으로 개악시키는 것이다. 본래의 질서와 의미를 다르게 와전시키는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경험을 뒤섞고 있다. 경험적으로 익숙한 상황에 의미를 두어 말씀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즉 창조의 질서를 파악하지 못하도록 혼잡케 하는 것이다. 창조의식의 출발점을 희미하게 만들고, 정확한 지점의 표시를 희미하게 한다. 반면에 "혼미"는 눈을 멀게 하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분별력을 무디게 하여 마음의 눈을 어둡게 하는 것이다. 즉 시작점과 끝점을 직선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멀게 하는 것이다. 창조의식이 없는 이러한 혼미한 눈은, 눈으로 바라보아 아는 것이 아니다. 오직 경험적으로 익숙한 것만을 아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혼잡과 혼미가 현재 이 땅의 인간들의 상태이다. 창조의 파괴로 혼잡케 된 모든 현상과 사물들이 우리의 마음을 혼미케 한다. 이로써 어그러진 가운데 어그러진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인간의 현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인간을 회복시켜 주셨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창조부터 지금까지 인간을 위한 "단 한가지 계획"을 진행 중이실 뿐이다. 그 계획은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의 나무로 설명할 수 있다. 그 나무가 무엇일까? 바로 창2:9의 "생명나무"이다. 성경에서 마지막으로 나오는 나무의 이름도 계22:19의 "생명나무"이다. 인간에게 임한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나무의 존재와 함께 임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창조시부터 종말에 이른 후까지 생명나무와 함께 존재한다. 창조시에는 생명나무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었다. 이때 아담에게만 부여된 선택권이 있었다. 불순종하여 경계선을 넘어서든지, 순종하여 경계선 안에서 누리며 살든지 이다. 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를 통해 영생의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보며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자신의 관계를 본다. 이 의식 속에서 생명나무를 통해 영생을 누릴 수 있었다. 경계선을 통해 생명을 주신 분을 의식하며 영생의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동산 중앙에 이 두 나무를 두셨던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대표자 되는 아담이 인류를 대표한 계약을 이행하지 않았다. 계약대로 약속된 길을 걷지 않고 반응하지 않았다. 계약 당사자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어긴 것이다. 책임(responsibility)이란 반응(response)하는 능력(ability)인 것이다. 계약 당사자로서의 반응하는 능력이 불순종으로 반응하게 한 것이다. 그는 누릴 영생보다 자유를 위해 금하신 영역을 넘기 위해 불순종했다. 그는 예정된 영생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금지된 경계선을 넘어 하나님의 영역에 들어서려다 영적 죽음을 당했다. 아담 이후 영적으로 죽은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상실했다. 그러므로 지금의 우리는 선택의 여지도 없이 죄만 짓고 사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추방된 세상 나라에서 영벌을 향해 사는 것이다. 본능처럼 죄를 짓고 사는 것이다.

 

그런데 범죄한 인간에게 더 큰 위기는 죄인으로서 영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에서 추방하시고 생명나무를 지키셨다(창3:22-24). 이것은 죄의 형벌이며 동시에 죄인으로서의 영생을 방지하기 위한 사랑이다.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를 없애지 않고 지키게만 하셨다.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소망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작정에는 변화가 없으심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영생의 삶을 누리게 하실 하나님의 계획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기능을 회복할 수 있는 소망을 주신 것이다. 이 소망이 되는 생명나무는 창세기 이후에 더 이상 언급이 없다. 잠언서에 단 두 번만 언급될 뿐이다(잠11:30, 13:12).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들어서면 다시 소망이 되는 생명나무가 나타나게 된다(계2:7, 22:2,14,19).

 

이곳에 등장하는 생명나무는 누구에게 주어지는 것일까? 누가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고, 파괴된 영혼과 파괴된 질서와 조화가 소성되는가? 누가 생명나무가 있는 성에 들어가며 생명나무에 참예하는가? 불순종으로 죄를 지어 영적으로 죽고 육체까지 흙으로 돌아갈 죄인은 안된다. 이들은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영생의 삶을 누릴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위해 계획하신 일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인간이 계획된 길로 들어서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죄인된 우리를 위해 대신 불순종의 심판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 예수님께서 나와 모든 인간을 위해 둘째 아담으로써 순종의 길을 선택하셨다. 죄의 삯인 사망을 친히 당하신 것이다. 내가 당할 저주를 십자가에서 친히 당하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셨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 소식을 모든 인간에게 복음으로 증거하고 계신다. 부활의 주님을 맞이하여 다시 영생의 길로 들어서도록 초청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에 사는 백성이 되게 된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는 것이다. 이로써 사망 권세가 더 이상 우리를 주관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안에 다시 사는 것이다. 생명되신 예수님을 통해 죽은 영이 거듭나 새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오직 은혜로 죄의 권세 상태에서 성령에 인도 받는 상태로 옮겨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된 것이다. 이것을 나타내는 표시가 "세례"이다.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관문과도 같은 것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나타내는 하나의 표시이다. 롬6:3-7에서 그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내가 믿음으로 예수님께 붙어 있을 때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산다. 물 속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와 함께 육의 죽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물 속에서 나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영적인 부활, 즉 중생을 하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죽고 장사지내고 살아나는 것이다. 고전15:3-4에서 예수님이 죽고 장사지내고 살아나신 것과 같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동일한 과정을 밟는 것이다. 이것을 나타내고 공개하는 표시가 세례인 것이다. 이것의 실제적인 작업은 성령님의 작업이시다. 우리가 복음을 들을 때 예수님은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어 역사해 주신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믿음이 생기게 하신다. 이 믿음으로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받아들이게 하신다. 이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내가 예수님을 잡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나를 잡고, 나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잡는 연합인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님과 연합된 나를 무조건 의롭다고 선언해 주신다. 의롭다는 선언을 받은 나에게 천국 백성이라는 자격을 주신 것이다. 이로써 생명나무 실과를 먹고 그 행사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들이 예수님 안에서 거듭난 성도라 할지라도 우리가 놓여진 세상에는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가 공존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 그러나 아직 구원이 완성되지 않았다. 우리가 구원되었지만 옛 아담의 족속들이 사는 세상나라가 그대로 존속한다. 우리는 그 세상 나라에 속해서 살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세상 나라의 원리가 함께 공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이 공존은 계속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잘 분별해야 한다. 우리는 이 공존 속에서 세상나라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잘못된 것에 익숙하기 때문에 이것을 정상으로 착각하기 쉽다. 정상이 아닌데 익숙해져 있기에 정상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왜곡되어 있는 상태 속에서 사건, 사물을 보기 때문에 잘못 다루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한다. 잘못된 것을 정상으로 알며 신앙생활을 하려 하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서 작업을 시작하신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때 성령께서 시작하신다. 예수께서 비정상으로 된 모든 피조 세계를 정상으로 돌리는 사역을 시작하신다. 성령은 예수께서 실행하여 이루어 놓으신 사역을 구석구석 적용하게 하신다. 성령께서 작업을 시작하는 그 사람이 천국 백성이다.

 

고후5:17에는 이런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이라 부르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이미 피조물인 존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 것이다. 창조시의 원형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이 파괴된 존재를 십자가에 죽이셨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 새창조로서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빚으신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은 땜질식으로 보수된 피조물이 아니다. 모두 철거하고 부셔서 새로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관계를 회복시키셨다. 창조 후에 파괴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조화를 회복시키신 것이다. 고후5:18에서 그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케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이다. 파괴된 하나님과의 조화가 이루어져 항상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관계가 회복된 새로운 피조물에게 "새로운 명령"을 하신다. 창조시에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인간에게 크게 두가지 명령을 주셨었다. 하나는 생육,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이었다. 또 하나는 만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이었다. 인간은 이 명령을 수행하여 피조세계의 질서와 조화를 유지시켜야 했다.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위임받은 명령을 수행할 때 자신에게는 기쁨이었다. 이것이 하나님께는 영광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불순종으로 이 명령은 순종할 수 없게 되었었다. 영적으로 죽은 존재라 영적인 하나님의 명령을 알고 순종할 수 없는 것이다. 불순종으로 불타는 지옥에 보내질 자로 된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회복시키신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 새생명을 주어 거듭나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거듭난 새생명에게 다시 "두 가지의 큰 명령"을 하시는 것이다. 하나는 마28:19에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고후5:17-21절에서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담당하라"는 것이다. 이 두 명령은 창조시의 명령과 일치되는 명령인 것이다. 생육, 번성, 충만은 제자삼는 사역으로 대치되었다. 다스림의 직책은 화목하게 하는 직책으로 대치되었다.

 

첫째 명령인 마28:19의 "제자삼기"는 선교와 양육을 통한 그리스도의 몸의 충만이다. 우리는 영적으로 생육, 번성하여 이 땅에 충만케 하는 직책을 부여받았다. 영적 재생산의 직책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우리에게 이 직책을 주셨다. 그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제자삼는 사역"을 감당하도록 명령하셨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늘어나야 한다는 명령이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다. 엡1:23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교회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이신 "그리스도의 충만"이라 하신다. 그리스도로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의 수가 충만한 것이 교회라는 것이다. 질적으로 양적으로 충만한 것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라는 것이다. 따라서 선교사명을 통해 작은 예수들의 수를 증가시켜 몸을 완성시켜야한다. 그 수가 다 찰 때만이 그리스도의 몸이 완전히 충만해지기 때문이다. 이 안에 채워진 작은 예수들은 성장하여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러야 한다. 이를 위해 전도와 양육이라는 "제자삼기"가 명령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나의 위치가 겨자씨 한 알처럼 작을지라도 자라야한다. 그 수가 양적으로, 질적으로 채워질 때 머리되신 주님은 다시 오신다. 이것이 첫째 명령이다.

 

둘째 명령인 고후5:17-21의 "화목케 하는 직책"은 문화명령의 수행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목케 하는 직책을 주셨다. 그리고 관계가 회복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부탁하셨다. 그리고 이 땅을 하나님과 화목케 시킬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임명하셨다. 만물을 예수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케 시키는 청지기의 일을 맡은 것이다. 이를 위해 말씀과 권능을 받은 것이다. 영적으로 거듭난 자에게, 새생명을 얻은 자에게 주시는 명령인 것이다. 그동안 교회에서는 제자삼기의 기본직책을 강조해 왔다. 반면에 큰 두 줄기 가운데 하나인 화목의 직책이 소흘히 취급되었었다.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다. 이제는 그리스도를 통해 화목의 직책을 감당해야한다. 나 자신과 만물과 이웃 사이의 조화를 이루는 직책을 감당하여야한다. 우리에게 부여된 기본 직책을 알고 수행할 때 영생의 특권을 누리며 산다. 우리에게 화목의 직책이 부여되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을 위해서이다. 나를 구원하신 이유도 나로 예수님을 통해 만물을 화목케 하도록 하시기 위해서이다. 지금 우리가 모든 것을 다스리는 것은 화목과 화평으로 나타난다. 마5:9에서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고 했다. 이 화목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기본직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화평은 세상과의 타협이 아니다. 히12:14의 말씀처럼 거룩함을 유지하는 화평이다. 내가 상대에게 따라 붙는 타협의 화평이 아니다. 상대를 거룩한 내 쪽으로 이끌어 오는 화목과 화평인 것이다. 우리가 상대에게 따라 붙는 화평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제일 쉬운 일이다. 그러나 거룩함을 유지하는 화평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모르는 자는 화평의 직책을 담당하기 힘들다.

 

하나님은 화목의 직책을 담당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주시는 그것을 잘 감당하지 못하고 욕심을 채우는 데 쓰고 있다. 이것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것의 노예, 포로로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학업도 이 화목을 위한 일이다. 만물의 속성을 잘 알고 화목으로 다스리기 위해 지식을 얻는 것이다. 이럴 때 만물 속에 나타나는 질서와 조화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고 내게는 기쁨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선전원으로 사용하셔서 그 일을 행하신다. 벧전2:9에서 우리로 예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기 위함이라 하셨다. 우리의 화목케 하는 직책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보이길 원하신다. 안 믿는 사람들이 이들 가운데 왔을 때 이것을 보고 돌이키게 된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화평의 직책을 감당할 때 그들에게 빛이 비취는 것이다. 이때 이 사건들 속에 계신 하나님의 메시지를 알 수 있다. 화목의 직책을 회복하지 않으면 많은 사람이 우리들 때문에 걸림을 당한다. 내가 화평의 직책을 감당할 때 하나님의 나라는 소리 없이 확장되어 간다. 우리는 직장과 학교 등에서 말로써 이전에 화평으로써 복음을 심어야 한다. 그리고 이 복음으로써 영적 재생산을 하여야한다. 이로써 두 가지의 큰 명령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명령의 수행이 새로운 피조물의 정상적인 모습이다. 이 명령의 수행은 창조시의 시작점을 알게 한다. 그리고 앞으로 진행되어 도달할 끝점도 알게 한다. 또한 시작점과 끝점 사이의 진행 과정도 알게 한다.

 

시작점인 창조와 끝점인 종말까지를 이어주는 생명나무의 직선을 통해 세상과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 구원받은 성도는 이 직선을 기준으로 위로 하나님을 향한 제사장직을 수행한다. 옆으로 세상을 향한 왕직을 수행한다. 그리고 미래를 향한 선지자직을 수행하며 나아간다. 이럴 때 창조의 질서와 조화를 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 죄악된 이 세상은 이 모든 질서가 무너졌다. 인간의 세 직분이 모두 사라져 버리고 자기가 하나님이 된 직분만 있다. 처처에 지배하려는 욕망만 가득 차 있다. 이 욕망에 의한 소유의식이 비교의식으로, 그리고 경쟁의식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 경쟁의식은 결국 상대를 죽이는 살인행위로 종말을 이룬다. 구원받은 우리는 그 직선 위에서 제사장직으로서 영적예배를 수행해야 한다. 그리고 세상을 행해 왕직으로서 화목케 하는 직책을 감당해야 한다. 또 미래를 위한 선지자직으로 제자삼는 사역을 행해야 한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직책이다. 이것이 시작점과 겹치는 원점이다. 시작점과 끝점은 일치되어 두 점 사이가 직선을 이루고 있다. 이 직선 상에서 분별하며 해석하여 반응할 때 질서와 조화가 유지된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알고 반응한다. 이 틀이 바로 창조의식을 정상적으로 가동시킨다. 창조의 질서와 새창조 사이의 연속성을 중심으로 세상과 사건과 사물을 보아야 한다. 이 연속성 속에서 인간과 교회를 보아야 한다. 이에서 벗어난 것은 비정상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벗어난 그것이 정상으로 되돌아 올 수 있는 방법으로 반응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늘 창조의식의 틀을 새롭게 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공동체적으로 예배와 성찬식을 통해 늘 새롭게 되어지게 하셨다. 개인적으로는 말씀과 묵상과 기도의 큐티 생활을 통해 늘 새롭게 되어지게 하셨다. 우선 우리는 반복적으로 성찬식을 통해 창조의식의 틀을 새롭게 해야한다. 첫째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통한 기념을 통해 새롭게 한다. 고전11:23-25에서 예수님은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수직 관계를 점검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나에 대한 지식을 통해 믿음의 영역을 점검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예배자로서의 제사장 직분을 점검하는 것이다. 둘째로, 고전10:16-17에서 떡의 하나됨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매 성찬식마다 하나됨을 기억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된 형제들을 인식하게 된다. 반복적으로 믿음의 형제들을 사랑으로 보게 하고 사랑으로 교제케 된다. 그러므로 성찬식은 모든 영역에서 사랑으로 왕직분을 감당하도록 새롭게 하는 것이다. 세째로, 고전11:26에서 성찬식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지키라고 하신다. 우리는 매 성찬식 때마다 우리의 눈이 주님이 다시 오실 때로 향하게 된다. 이로써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선지자 직분을 새롭게 한다. 그러므로 성찬식은 반복적으로 종말의 재림을 기대하는 소망을 점검하는 것이다. 이처럼 성찬식에서 믿음, 사랑, 소망을 점검하며 창조의식의 틀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날마다 말씀을 상고하며, 개인적으로 이것을 새롭게 한다. 아침마다 큐티 교제를 통해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예배한다. 큐티의 적용을 통해 하루의 삶을 사랑으로 화목의 직책을 감당한다. 말씀이 적용되는 영역의 확산을 보며 미래의 소망을 강화시킨다. 선교현장에서의 그리스도인의 확산을 보며 종말의 때를 기대한다. 이로써 창조의식의 틀은 견고해지게 된다. 딤후3:16-17 말씀에 이 기능이 잘 설명되고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 성경말씀을 통해,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 우리가 하나님의 감동을 받는다. 날마다 말씀을 상고할 때마다 하나님의 감동을 받는 것이다. 이때가 어느 때인가? 이것은 주로 개인적으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큐티 시간이다. 이로인해 우리는 우리의 나아갈 길, 걸어갈 길을 분별하게 된다. 이것이 "교훈"의 길이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시작점과 끝점을 분명히 보게 해 주시기 때문이다. 매 순간의 선택의 기로에서 하나님의 뜻인 것을 분별하게 한다. 그리고 큐티를 통해 우리가 잘못 들어선 길을 분별하게 한다. 이것이 "책망"이다. 창조의식의 틀에서 오른편, 왼편으로 치우친 것을 바라보게 하기 때문이다. 큐티를 하지 않는 한 잘못 들어선 것을 깨달을 수 없다.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이 자신이 선택한 길이고 익숙한 길이라 정상으로 보이게 되기 때문이다. 큐티는 또한 우리가 들어서야 할 길을 알려준다. 잘못된 길을 걷는 우리가 바로 잡아야 할 길을 알려준다. 이것이 "바르게함"이다. 창조의식의 틀이 되는 직선이 항상 우리에게 보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큐티를 하지 않는 한 우리가 잘못을 알아도 돌아갈 곳을 모르며 방황한다. 그리고 큐티를 통해 성경은 우리가 창조의식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게 이끌어준다. 이것이 "의로 교육함"이다. 지속적으로 그 길을 걷도록 경험시키며, 훈련 시키시는 것이다. 창조의식이 늘 우리 가운데 생생하게 살아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큐티를 하지 않는 삶은 이 세상에서 암흑을 걷는 것과 같은 것이다. 큐티를 통해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케 한다. 큐티를 통해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이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한다. 성령은 큐티를 통해 모든 선한 일을 분별케 하여 온전한 자로 행하게 하신다.

 

갈1:4에서는 이 세대를 "악한 세대"라고 부르고 있다. 악하고, 패역하고, 음란한 세대, 악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대라고 규정한다. 이 세대에는 이 세대의 지배자 사탄이 있다. 고후4:4에서는 그를 "이 세상 신"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기에 이 세상은 영적 전쟁터이다. 악의 원리가 세상에 통용되고 있다. 잘 통용되는 이 원리는 우리 눈에 익숙하다. 그리고 편하며, 육을 뿌린 대로 많은 육을 거둔다. 그러나 창조의식을 지닌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택하지 않는다. 자세히 주의하며, 하나님 나라와 관계하는 것을 택하며 살아가고 있다. 세상 원리에 따르는 삶은 하나님 나라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엡5:5에서 세상 원리에 따르는 사람은 기업을 얻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기에 이 원리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다. 영적 전투의 현장, 악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지금 우리가 사는데 문제가 없다면 그 사람은 영적으로 둘 중의 하나이다. 영적으로 죽은 자이거나 잠자는 자이다.

 

엡5:14에서 우리에게 강력히 알려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영적으로 죽은 자에게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잠자는 자들은 깨워야 한다. 우리가 세상에서 바라보는 자들은 잠자는 자들이 아니라 죽은 자들이다. 세상 원리를 따르는 자들은 죽은 자들이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로 사는 사람은 죽은 자가 아니다. 창조의식을 통해 살아갈 생명을 지닌 성도들이다. 그런데 주위가 다 누워 있다고 함께 누워 있는 시늉을 하는 것은 잠을자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원리의 지배만을 받는 죽은 자처럼 잠자지 말아야 한다. 깨어서 일어나 산 자로서 창조의식으로 살아야 한다. 다수가 하는 것이라고 죽은 자가 하는 것같이 흉내내고 있으면 안된다. 산 자가 죽은 자들처럼 누워 있는 것은 괴롭고 불행한 것이다. 성도로 부름받은 자이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예배명령, 미래를 향한 선교명령, 만물을 향한 문화명령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잠자는 상태 있는 것이며,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신학적인 세상과 인간이해를 기초로 한 인간과 교회의 회복을 통해 이 세 명령을 감당해 나가며 깨어있는 자의 평안과 안식과 기쁨의 축복을 누려야 한다.